문화재 > 사처석교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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동래부사 이문원의 기부금과 동래부 유지들의 모금을 바탕으로 동래부의 남문 밖에 있던 네 곳의 나무다리를 돌다리(石橋)로 바꾼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. 원래 동래고등학교 앞 길가에 있던 것을 도로확장공사로 인하여 금강공원 안의 임진동래의총 입구에 옮겼다가 그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긴 것이다.
나무다리는 1∼2년마다 다시 고쳐 쌓게 되는데 그때마다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다. 이에 강위성이 지역 주민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고 박도유, 박사인 등 4∼5명이 지역을 돌며 모금하자 당시 동래부사까지 자신의 녹봉을 기부하여 협조함으로써 돌다리가 완성되었다. 이는 지역 주민이 단합하여 이룬 실리적 사업이었다.
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은 조선 정조 5년(1781)에 세운 것으로 앞면 윗부분에 ‘사처석교비’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이 돌다리를 세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. 비석의 글씨는 부산진순절도(보물), 동래부순절도(보물)를 그린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인 변박(卞璞)이 썼다.
이 비석은 당시의 도로와 다리의 존재를 알려 주는 사료적 가치 뿐 아니라 비석의 건립연대 및 석교의 개축년대가 명확하여 향토사적 가치도 높은 문화유산이다.
나무다리는 1∼2년마다 다시 고쳐 쌓게 되는데 그때마다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다. 이에 강위성이 지역 주민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고 박도유, 박사인 등 4∼5명이 지역을 돌며 모금하자 당시 동래부사까지 자신의 녹봉을 기부하여 협조함으로써 돌다리가 완성되었다. 이는 지역 주민이 단합하여 이룬 실리적 사업이었다.
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은 조선 정조 5년(1781)에 세운 것으로 앞면 윗부분에 ‘사처석교비’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이 돌다리를 세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. 비석의 글씨는 부산진순절도(보물), 동래부순절도(보물)를 그린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인 변박(卞璞)이 썼다.
이 비석은 당시의 도로와 다리의 존재를 알려 주는 사료적 가치 뿐 아니라 비석의 건립연대 및 석교의 개축년대가 명확하여 향토사적 가치도 높은 문화유산이다.
기본 정보
문화재유형 | 시도기념물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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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정호수 | 52 |
문화재명 | 사처석교비 |
문화재명2 | 四處石橋碑 |
문화재분류 | 기록유산 |
문화재분류2 | 서각류 |
문화재분류3 | 금석각류 |
문화재분류4 | 비 |
수량 | 1기 |
지정(등록일) | 20011017 |
소재지 상세 |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(대연동,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) |
시대 | 조선 정조 5년(1781) |
소유자 | 부산광역시 |
관리자 | 시립박물관(부산박물관)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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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처석교비
컨텐츠 저작권
문화재청 및 공공데이터포털의 Open API 서비스를 통해서 구현되었습니다.